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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잊어라는 옛말"... 이별의 흔적, 억지로 지울 필요 없어


소중한 이를 떠나보낸 뒤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남은 흔적을 모두 지워야만 하루빨리 상처가 아문다"고 조언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상대와의 감정적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내야 회복된다고 보았던 과거 정신분석학에 뿌리를 둔 믿음이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은 무조건적인 망각 대신, 상실한 대상과의 '내면적 유대'를 건강하게 이어가며 일상을 되찾는 새로운 애도 방식에 주목한다. 여전히 남은 물건 앞에서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이들이라면, 심리적 회복이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에 정신건강의학과 김창남 교수(삼성창원병원)와 함께 슬픔을 온전히 느끼면서도 내 삶의 궤도를 굳건히 유지하는 '투 트랙(Two-Track) 애도법'의 구체적인 원리와 올바른 상실 극복 방법을 짚어본다.

무조건 끊어내고 지워야만 할까? - 프로이트 초기 애도 모델의 한계
사랑하는 대상을 잃은 후, 남겨진 사람이 경험하는 주관적 심리 반응을 비애(Grief) 또는 애도(Mourning)라고 한다. 이러한 애도의 과정을 겪다 보면 주변에서 흔히 이런 말을 듣게 된다. "빨리 잊어야 낫는다"거나 "사진이나 물건을 전부 없애야 마음이 정리된다"는 말이다. 상대의 흔적을 지우고 감정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내야만 비로소 회복이 시작된다는 이 믿음은 오랫동안 통용돼 왔다.

이 관점의 이론적 배경은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에서 찾을 수 있다. 프로이트는 상실을 극복하려면 잃어버린 대상에 쏟았던 심리적 에너지를 거두어들이고, 그 대상과의 감정적 유대를 해소해야 한다고 봤다. 이는 애도를 대상과의 유대를 종결짓는 과정으로 바라본 초기 모델로, 현대 심리학의 관점에서는 한계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억지로 잊으려 할수록 커지는 고통, 상실의 슬픔을 부인하지 말아야
하지만 현실에서 완전한 단절을 이루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아를 형성하는 존재인 만큼, 오랜 시간 유대를 맺어 온 대상을 억지로 지워내는 것 자체가 심리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은 시도다.

김창남 교수는 "상실을 겪은 사람은 궁극적으로 죽음(혹은 이별)의 실체를 받아들이게 되지만, 상실한 대상의 기억을 간직하려는 심리적·상징적 방법을 찾기 마련"이라며 "이러한 정상적인 심리적 회복 과정을 억지로 부인하거나 잊으려 하는 것은 회복 기간을 오히려 늘리는 등 치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그는 "최근 심리학 연구들에서는 이러한 기조가 바뀌어, 애도란 상실한 대상과의 관계를 새롭게 재정립하며 그 유대를 지속적으로 이어 나가는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관계의 단절 아닌 '새로운 유대', 일상과 기억을 함께 챙기는 '투 트랙' 애도법
이러한 흐름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이스라엘 하이파 대학교의 연구다. 연구진은 2009년 국제학술지 죽음 연구(Death Studies)에 수백 명의 사별 사례를 분석한 '투 트랙 애도 모델(Two-Track Model of Bereavement)'을 발표했다. 이 모델에 따르면 건강한 치유가 이루어지려면 두 궤도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하나는 생물심리사회적(biopsychosocial) 기능의 적응, 즉 '일상 회복'이고 다른 하나는 고인 또는 이별한 상대와의 '내면적 관계 유지'다.

첫 번째 트랙인 '일상 회복'이란 상실 이전의 생활 리듬을 되찾아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김창남 교수는 "상실 직후에 느끼는 슬픔, 죄책감, 그리움, 분노와 같은 강렬한 부정적 감정이 있더라도 삶이 멈추거나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으며, 일상을 회복했듯 이러한 심리적 어려움도 결국 이겨낼 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트랙인 '내면적 관계 유지'는 상대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 같은 감정을 부인하지 않고 충분히 느끼고 나눔으로써, 상실한 대상이 기억 속 편안한 자리에 머물러 추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헤어진 사람의 물건이나 사진을 간직하는 행동은 병적인 집착이 아닌, 두 번째 트랙의 자연스러운 표현일 수 있다.

기억할 시간을 허락하는 것 자체가 치유... "언젠가 추억으로 자리 잡을 것"
투 트랙 애도법은 순서대로 완료되는 단계가 아니다. 일상 속에서 두 궤도가 동시에 작동하며 서로를 지탱하는 과정이다. 두 번째 트랙이 보여주듯, 상실한 대상과의 내면적 유대를 이어가는 것은 회복을 방해하는 미련이 아니라 치유의 자연스러운 일부다. 헤어진 사람의 물건을 당장 버리지 못하더라도 문득 그 이름이 떠오르더라도, 그것이 곧 회복이 더딘 증거는 아닌 셈이다. 슬픔을 온전히 느끼면서도 삶을 이어가는 것, 그 두 가지가 함께할 때 비로소 진정한 심리적 치유가 가능하다는 것이 이 모델의 핵심 메시지다.

김창남 교수는 "상실 이후의 괴로움을 억지로 부인할 필요도, 반대로 그 괴로움에 완전히 빠져 아무것도 하지 못할 필요도 없다"며 "괴로운 것은 당연하지만, 그 감정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어서 그는 "삶은 상실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상실의 괴로움은 언젠가 지나가 편안한 추억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애도 기간이 지나치게 길어지거나 일상을 유지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연장된 애도 장애(Prolonged Grief Disorder)'로 이어질 수 있다. 이때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의 상담을 고려하는 것이 좋다.